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비판과 반론 (문단 편집) === 반론 ===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맹자|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백성이 인군을 버리고 따르는 데에 있어서는 털끝만 한 여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하민지약야 불가이력겁지야 지우야 불가이지기지야)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득기심즉복지 부득기심즉거지 거취지간 불용호발언) >---- >ㅡ 《조선경국전》 >'''"[[맹자|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 >ㅡ 《삼봉집》 >태어나면서 사람은 각기 사적이고 각기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천하에 공적인 이익(公利)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도모하지 않고 공적인 해악(公害)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누군가 나와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자신의 해악을 해악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해악을 해소하게 하였다. 이 사람의 수고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보다 천만 배이다. 무릇 천만 배의 수고를 하고 자신은 그 이익을 향유하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의 인지상정으로는 반드시 그런 자리에 서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헤아려 보고서 군주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허유(중국 신화)|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그들이다. 들어갔다가 다시 떠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요(堯)와 순(舜)이 그들이다. 처음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우(禹)가 그러하다. 어찌 옛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과 다른 바가 있어서 그리하였겠는가? 편안함을 좋아하고 수고로움을 싫어하는 것은 역시 인지상정이다. > >후대의 군주들은 그렇지 않다. 천하의 이해관계의 권한이 모두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천하의 이익을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 천하의 해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사적인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의 매우 사사로운 일을 천하의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오래 지나면서 안주하여 천하를 커다란 기업으로 여겨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향수하게 하려 하였다. 내가 이룬 성취와 작은 형이 이룬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많은가?라는 한고조의 말은 이익을 좇는 속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의 인민이 주인(主)이고 군주는 객(客)이어서, 군주가 일생토록 경영하는 바가 다 천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오늘날 군주가 통치의 주체(主)가 되고 천하의 인민은 객이 되어 천하에 평안한 곳이 없는 것은 다 군주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를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들의 간과 뇌를 해치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키며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리려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나는 본래 자손을 위해 창업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천하 사람들의 골육을 착취하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키며 자기 혼자의 음란과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여 이것은 나의 재산에서 나온 이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해악은 오직 군주다. 만약 군주가 없다면 사람들이 각기 사적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어찌 군주를 둔 것이 본래 이와 같았겠는가! > >옛날 천하의 사람들이 그 군주를 위하여 받드는데 아버지에 비기고 하늘에 견주었어도 진정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마치 원수 대하는 것과 같고 그를 독부(獨夫)라고 이름하는데, 참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선비들(小儒)은 얼빠진 모양으로 군주와 신하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빠져나갈 데가 없다고 하여, 걸주와 같은 폭군까지도 탕무가 목을 벤 것이 부당하다고 하며, 망령되이 [[백이와 숙제|백이숙제]]를 터무니없게 전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멸하여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저 썩은 쥐와 다를 바가 없다. 어찌 이 커다란 천지와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오로지 군주 한 사람만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가? > >그러므로 무왕은 성인이고, 맹자의 말은 성인의 말이다. '''후대의 군주는 (자신을) 아버지와 같고 하늘과 같다는 헛소리(空名)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엿보며 눈치보는 것을 금지하였다.''' 군주는 모두 성인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맹자>를 폐지하고 과거 과목에서 제외하기까지 하였는데, 어리석은 선비들에게서 근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 >비록 후대의 군주가 과연 이 재산을 보전하여 영원토록 전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사사로이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미 (천하를 자신의) 재산처럼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재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누가 나(군주)만 같지 않겠는가?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고, 자물쇠로 잠가놓아도, 한 사람의 지력이 천하에 갖고자 하는 많은 무리를 이길 수 없으니, 멀게는 몇 대에, 가깝게는 자신의 당대에 그 혈육의 파멸이 그 자손에게 일어난다. > >(중략) > >그러므로 군주의 직분에 밝으면 요순의 시대처럼 사람들은 (평화적으로) 선양할 수 있고, 허유나 무광 같은 이가 속세를 등지지 않을 것이다. > > - 황종희, <명이대방록> '군주에 대하여' (原君) 中 >어떤 사람이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고서"[* 이 구절은 <예기> 곡례 상에 있다. 의미는 '어린이가 부친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부친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도 부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황종희가 묻는 것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로 군주를 대하는 것이 신하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라고 할 수 없다. 자기 몸을 죽이면서까지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역시 신하라고 할 수 없다.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는 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의 최고 표준이다. 그래도 신하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면 신하의 도리는 어떻게 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 >저 넓은 천하는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신하와 관리를 두고서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 백성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며, 만민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 >나는 천하 만민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써 나를 강제하더라도 복종하지 않겠다. 하물며 형태가 없고 말도 없는 데에서랴!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조정의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물며 내 몸을 죽이면서까지 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군주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 드러내지 않는 기호와 욕망이 있을 때, 내가 따라서 그것을 보고 듣고 한다면 이것은 환관이나 궁녀의 마음이다. 군주가 자기를 위해 죽고 자기를 위해 망할 때, 내가 (이것에) 따라서 죽고 망한다면 이것은 사적으로 총애를 받는 자나 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신하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 > >세상의 신하들이 이런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신하는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군주는 나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주가 나에게 인민을 나누어주고 다스리게 한다고 하며, 천하 인민을 군주 주머니 속의 사사로운 물건 정도로 생각한다. 지금 사방이 시끄럽고 혼란하며 민생은 초췌하여 우리 군주를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하니, 이것을 다스리고 기르는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사직의 존망에 관계없다면 사방의 시끄러움과 혼란, 그리고 민생의 초췌함은 비록 직무에 충실한 신하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하잘것없는 걱정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 >저 옛날의 신하는 이런 (천하를 위하고 만민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저런 (군주를 위하고 일성一姓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 >대개 천하의 치란(治亂)은 일성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래서 걸주가 멸망한 것은 곧 치세(治世)가 되는 까닭이며, 진(秦)나라와 몽고가 일어난 것은 난세가 되는 까닭이다. 진(晋), 송(宋), 제(齊), 양(梁)의 흥망은 치란과 관계가 없다. 신하가 백성의 재난을 경시하면 곧 군주를 도와서 흥하게 하고 군주를 따라서 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신하의 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커다란 나무를 끄는 것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사람이 '어기' 하면 뒤에 있는 사람이 '영차' 하는 것과 같다. 군주와 신하가 함께 나무를 끄는 사람인데, 만일 손으로 나무를 동여맨 줄을 잡지 않고, 발로 땅을 디디지 않고, 나무를 끌어야 할 사람들이 나무를 끄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웃으며 놀기나 하고, 뒤에서 나무를 밀어주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좋다고 하면 나무를 끄는 일은 할 수 없다. > >(중략) > >어떤 사람은, 신하는 자식과 함께 칭하며 신자(臣子)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자식은 기(氣)가 통하며, 자식은 아버지의 몸을 나누어 (자신의)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효자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날마다 그 기를 가까이해서 오래되어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불효자는 몸이 나누어진 이후 날마다 멀어지고 소원해져서 오래되면 기가 서로 같지 않게 된다. > >군주와 신하의 명분은 천하 국가라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다. 나에게 천하의 책임이 없다면 나는 군주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나가서 군주를 섬길 때 천하 백성을 위한 것으로 일을 삼지 않으면 군주의 노비가 된 것이고, 천하를 위한 것으로 일을 삼으면 군주의 사우(師友)인 것이다. 그런즉 신하라고 하여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은 진실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 > - 황종희, <명이대방록> '신하에 대하여' (原臣) 中 유교 역시 군주, 아버지의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서는 신하와 자식이라 할지라도 들고 일어날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맹자]]와 '''[[중국]]의 [[장 자크 루소]]'''라 평가받는 [[명말청초]]의 유학자 [[황종희]] 또한 맹목적인 복종과 반대되는 주장들을 하였다. 심지어 황종희 같은 경우 군주는 사람들의 필요로 인해 생겨난 자리이며, 따라서 천하의 주인은 백성이고 군주는 객(客)이라고 봤다. 같은 원리로 특정 가문의 군주 세습을 비판했으며, 신하와 군주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아니라 '천하의 이익'을 매개로 묶인 철저한 비즈니스적 관계라 주장했다. 즉 천하의 이익이 아니라면 애초에 남남인 관계이므로, 혈연적 인연인 부모 자식 관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유교에서 말하는 예가 군주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장려한다고 알기 쉬우나, 논어 팔일편에서 말하는 예는 반대의 의미다. 정공이 묻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어찌해야 합니까? 공자가 이르시기를: 임금이 신하 부리기를 예로 하고, 신하가 임금 섬기기를 정성스러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가 무엇이기에 임금이 신하를 예로 부려야 하는가? 공자가 들으시고 이르시기를: 이것(알고 있음에도 하나하나 다시 물어서 그르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예이다.[* 실제 [[조선]]에서도 군주에게 무조건 복종만 하는 신하보다는 목숨걸고 간언하는 신하가 더 존경받았다. [[연산군]]을 꾸짖다 사망한 [[김처선]]이나, 숙종과 대립하다 귀양을 가고 결국 사약까지 마신 [[송시열]]등.] 유교는 다른 모든 제자백가의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사회규범이자 정치규범으로 존재했다. 애당초 춘추전국시대로 혼란한 당시 사회상에서 "나를 관직에 앉히고 나의 사상을 따르면 나라를 평화롭고 부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사상가들의 난립이 제자백가였음을 기억하자. 따라서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사회의 형태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제일 목적이 사회 안정과 평화였던 만큼 요즘 말로 [[공동체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띌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유교는 바람직한 사회질서를 제시하는 데에 당대로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것인데, 사회의 구성원리인 충을 효에서 도출해내는 것은 인간 사회가 그 어떤 세기말적인 파멸에 마주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절대 내어주지 않는 최후의 덕성과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가족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의된 권위가 없고 정당한 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질서, 효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은 개개인이 계몽되고 교육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갑갑하다. 특히 군주와 부모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역성혁명과 방벌을 인정한 100년 뒤의 맹자(100년 뒤라고 해봤자 기원전 4세기 사람이다)가 아닌 공자의 사상으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충효로 모시며 그 잘못을 간하되 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정성으로 보필하며 스스로 잘못을 깨달으시길 기다린다"는 방법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지배윤리로 실천된 유교는 백성에 대한 군주의 의무와 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혁명 및 방벌은 단순히 명목적인 가치에서 그치지 않고 왕조의 정통성, 상소와 간쟁 등의 정치역학적 구조, 구휼과 혜민 등의 실재하는 사회적 규범으로써 존재했다. 또한 이런 맹목적인 복종 탓에 유교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위에 나왔듯이 유교에서는 [[민본주의]]라 하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민본주의 자체는 근대 민주주의와 성격이 물론 다르지만, 백성=국민으로 치환하여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이를 위한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의 한 성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장 근대에 서구의 민주주의-공화정 체제의 내용을 접한 동아시아의 유림 인사들은 절대 이를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로서 장점이 있다고 인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